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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적끼적

이야기

  나는 집 안에 있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집 안의 모습은 내가 원래 살던 곳보다 더 크고 넓어져 있었다. 하지만 난 새로운 집 안의 모습들에게서 이질감을 느끼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집 안을 돌아다녔다. 미닫이식의 커다란 창문이 보이고 그 바깥으로는 다시 아파트의 베란다 같은 공간이 있다. 방안 구석구석 다소 구식이지만 그 구식의 인테리어와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는 집 안의 공기가 나에게 편안함을 느끼게 해준다. 

  점점 따뜻하게 밝아져 오는 햇빛을 느끼며 이제 막 오전에서 오후로 넘어가는 시간임을 알게 되었다. 엄마는 일하러 가셨는 지 집 안에서 보이질 않았고 다만 동생이 자신의 방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정오의 잔잔함을 여유롭게 느끼며 서 있었다.

  그러다 문득 스쳐 지나가듯 몸의 이상을 느꼈다. 내 몸 어디도 달라진 곳은 없지만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 햇빛이 점점 강해지는 것을 인지하는 찰나, 얼굴과 가슴을 비롯한 몸 앞부분의 고통이 느껴졌다. 햇빛이 닿는 부분들 이었다. 따가움, 쓰라림 등의 통증이 아닌 내 몸의 조직들이 사라져 없어지는 허무의 고통이었다. 
 
  예전의 나는 맑은 날을 좋아하지 않았다. 흐린 날, 특히 비가 내리는 날을 좋아했었다. 보통 사람들이 맑은 날에는 기분이 좋아지고 흐리거나 비가 내리는 날에는 우울해진다고 하지만 나는 그 반대였다. 하지만 자라오면서 비가 오는 날이 여전히 좋지만 맑은 날도 좋아지게 됐다. 그것은 마치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것과 같았다. 이제야 맑은 날의 즐거움을 느끼기 시작했는데 햇살의 따뜻함을 알게 됐는데, 지금 나의 이런 고통은 너무나 무참했다. 

  영화 '박쥐'에 나오는 흡혈귀와 같은 치명적인 약점을 갖게 된 것일까. 하지만 그들과 달리 난 피에 대한 욕망을 느낄 수 없었고 힘 또한 강해지지 않았다. 그저 더 이상 햇빛과 마주할 수 없는 운명에 처하게 된 것 뿐이다. 한낮에 파란 하늘과 함께 다가오던 시원한 햇빛도 해질녘에 따뜻하게 나를 감싸주던 햇빛의 느낌도 허망하게 사라져 버렸다.

  햇빛은 너무나 강렬하게 빛났다. 햇빛은 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하얗게 불타올랐다. 날카롭게 무수하게 쪼개진 칼날같은 햇빛은 언제라도 나를 관통해버릴 것 같은 공포를 안겨주었다. 나는 쫒기듯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방으로 도망쳤다.

  편안하게 느껴지던 집이라는 공간이 마치 살얼음판 위에 놓인 것처럼 불안하고 두려워졌다. 믿을 수 없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거짓말 같았다. 꿈 같았다. 나는 스스로에게 자기암시를 걸 듯 최면을 걸 듯 지금 상황을 잊어버리려 애썼다. 그리고 다시 햇빛이 잘 들어오는 거실의 창가로 갔다. 그러나 어김없이 햇빛은 나를 무참히 소멸시키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힘겹게 서 있었다. 눈물과 함께 질척한 피가 발 쪽으로 떨어진다. 손을 타고 발을 타고 흘러 내린다. 인기척이 느껴져 뒤를 돌아 보았다. 동생이었다. 울고 있었다. 선명한 눈물 자국이 빠르고 거칠게 짙어져 가고 있었다. 동생을 보며 어떠한 표정도 지어줄 수 없었다. 참을 수 없는 눈물을 계속 흘릴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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